본문 바로가기
여행/Camino_Frances_2019

트레커의 순례길.

by babelfish 2020. 1. 10.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히말라야 트은 힘들고 위험해도 내 오랜 취미인 등산과 비슷한 길이라 주변 사람들도 '쟤 또 산 타러 가나보다'라 여겨 딱히 별 말이 없던데 까미노 간다니 왜 그 시간과 노력을 들여 거길 걷는가라는 질문이 따라붙더라. 그러게, 왜 걷지? 자신을 발견하러? 인생을 되돌아보는 기회? 그런 거 아냐, 스페인 길바닥에 내 인생이 널브러져 있을 리가 없잖아. 사람들 참, 나고 자란 곳 놔두고 왜 그 멀고 낯선 데까지 가서 인생 찾나 몰라. 난 그저 여행객으로서의 호기심과 트레커의 객기를 동력으로 항공권을 끊었다. 초심자답게 프랑스 길 선택. 따져보면 네팔 산길에 비해 썩 안전하고 수월할 길. 준비야 충실히 할 테지만 내심 만만하게 봤다. 솔직히 그럴만하지 뭐.

가다보면 끝이 보이겠지. 그냥 길이라메요?

 

 돌이켜 생각하면 좀 부끄러운데 난 산티아고가 누군 지도 몰랐었다. 야고보? 12 사도의 야고보야 당연히 알지만 그 이름을 까미노의 산티아고와 연결하진 못했어. 그게 잔다르크와 조안, 산미겔과 마이클처럼 변형된 발음 때문에 알아채지 못한 탓도 있지만, 애초에 내가 그 길에 대해 궁금했던 건 교통편과 숙박 시설, 마을 사이의 거리 같은 생존을 위한 정보였지 인물이 아니었거든. 산티아고가 누구, 아니 '무엇'이라도 상관없었어. '스페인 기독교의 셀럽까지 내가 어찌 알아, 가다 보면 알겠지.'그랬다. 이게 정말 멍청한 생각인 것이, 그 양반이 단지 스페인 지역구 인물이었으면 까미노가 그렇게 유명한 길이 되진 않았을 거 아냐? 당연히 월클이지. 니가 무시해도 되는 이름이 아니라고. 이 긴 길에 오르면서 당연히 그 의미를 좀 더 무겁게 생각하고서 준비했어야지. 젠장, 출발하기 전부터 헛다리 짚었네.

 그런데 좀 이상하지, 까미노 준비하면서 산티아고가 누군 지 모르는 게 가능한가? 순례자 협회의 가이드 첫 항목이 '1.산티아고는 누구인가'인데? 나도 읽었어 그 페이지. 아무리 트레커 모드의 좁은 시야로 필요한 정보만 골라 모았어도 공식 홈피 첫 페이지 첫 줄인데 지나칠 수가...... 있었나? 지금 생각해도 이해 안 되는데 현실의 내 머릿속에서 야보고는 사라지고 스페인 사람 모모 씨만 남았다. 아아, 이것이 실질 문맹이란 것이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일행들과 '산티아고'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어서야 "잠깐, 그게 열두 제자의 그 야고보였어? @.@;;" 라며 툭 튀어나왔다. 한심하지? 무덤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참배하러 간 거잖아.

산티아고를 표현한 유적들을 만날 때 마다 내가 얼마나 개념 없이 출발했는지 일깨워주는 것 같아 많이 민망했다.


 준비 과정에서도 순례자가 아닌 트레커인 게 뻔히 보인다. Peregrino라면 길 위의 역사와 문화, 걸으면서 거쳐가게 될 지역에 대해 공부했을 테고 일정 계획 세울 때도 하루치 이동 거리를 기준 잡을 게 아니라 성당과 유적의 의미를 살펴 머물고 싶은 마을을 골랐겠지. 아니 그전에 왜 이역만리 타향까지 가서 그 긴 길을 걸어야 할 이유를 고민하지 않았겠어? 하지만 전투형 여행자인 난 본분에 맞게 지형과 날씨에 적합한 장비를 마련하고 현지에서 사용할 어플을 깔고 정보를 모아 길과 싸울 준비를 마쳤다. 산티아고가 누군 지도 모른 채.

쌈박질은 열심히 했어.

 여행 준비할 때 대도시 사이의 이동 방법과 항목 별 예산 계획까지는 꽤 세밀하게 세운다. 그래 봤자 낭패할 확률을 줄여 무사히 돌아오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 그런 거 재밌어하고 썩 잘하는 편이다. 그렇게 정보 모으고 변수 체크하다 보면 점점 안전하고 편한 여행이 되어 가는데 어느 순간 '이걸 어느 정도의 깊이까지 해야 하나?'라는 고민에 부딛힌다. 과한 선행 학습은 자칫 첫 여행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재밌는 실패의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기도 하거든. 결국 이런저런 걱정으로 준비하다 별 다르지도 않은 이유로 대충 지칠 때쯤 멈춘다. 지 좋을 대로 하는 거지.

 사실 중요한 건 정보의 양이 아니라 성격이다. 내 준비를 모드 별로 나눠보면,
 트레커로서 : 85% - 발바닥 통증과 베드 버그 빼고는 '준비 단계'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여행자로서 : 10% - 현지에서 알아갈 재미를 미리 갉아먹을 필요는 없지. 이 정도면 충분해.
 순례자로서 : 5% - 안 했어, 솔직히 안 한 거야. 여기서 빵꾸 나네.

현지 보급 사정 파악해서 파밍하는 능력은 꽤 좋아. 문제는 여기가 전장이 아니라 순례길이라는 거지.

 

 한창 국내 여행 재밌게 다닐 땐 여행의 방식을 배워가며 필요할 때마다 적당한 모드를 선택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는데 이젠 뇐네라  전환이 잘 안 되더라. 그래서 이번 순례길도 내 좋아하는 트레일만으로 좁게 규정하고 그 범위 안에서만 둘러볼 생각이었다. 여행지의 성격을 파악하고 공부하기보단 장비와 체력에 치중한 준비 - 하드웨어 추가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보다 쉽거든. 근데 이번엔 그런 좁은 범위의 준비로는 많이 부족했다. 템빨 만으로 클리어할 수 없는 미션도 있는 법.

 부르고스 앞에서 만났던, 이 길을 성지순례 의미로 걷던 자매님들은 종교인으로서 지식과 동기가 있다 보니 지나치는 마을들의 작은 성당, 다리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면서 본인의 세례명과 관련 있는 유적에서 감동받기도 하면서 즐겁게 걸으시더라. 길에서 이야기 나누고 지식 얻어가는 짧은 시간에도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천주 신자님들은 저렇게 걷는구나. 난 이 길에서 뭘 보고 있나......' 하는 반성도 되고.

그러게, 난 뭘 보고 다닌 걸까?

 종교 유적을 봐도 별 감흥 없으리란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학생 때 읽었던 성경은 가물가물하고, 건축양식도 상식선에서 아는 정도. 그러니까 사전 지식이 아주 허술했거든. 까미노를 좀 더 재밌게 걷기 위해 필요했던 건 A.D 800년 즈음의 종교 전쟁사와 건축 양식에 대한 지식? 귀동냥을 위한 스페인어? 아이처럼 순진무구한 호기심이라도? 어쨌건 지난여름 내겐 없던 것들이었다.

이런 걸 보게되면, '이 닭꼬치는 뭐지?'라는 반응이 정상 아냐? 이게 베드로의 '그' 수탉인지 이슬람 장닭인지 내 알게 뭐람.

 대부분의 사람은 낯선 상황에서 결정 내려야할 때 정확한 해법을 찾기보단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을 선호한다 - 나도 그래. '여행에 정답이 없다'는 말은 어떤 해괴한 방식으로 시작하더라도 빵점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잖아. 망설이다 타이밍을 놓치기보단 익숙한 방식을 구동시켜 진행되는 동안 답을 찾아가는 것도 때론 괜찮지. 그렇지만 순례길 준비를 트레킹 경험치로 메우려했던 이번 경우는 불확실성을 염두에둔 '도전'이라기보단 '약한 고리에 대한 외면'에 가까웠고, 운이 아주 좋은 게 아니었던 난 그 외면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허술한 준비의 여행답게 보고 들은 것들은 쌓이지 않고 빠져나갔고 그 빈자리엔 놓친 것들에 대한 막연한 아쉬움이 남았다. 이 아쉬움도 좀 웃긴 게, 구체적으로 아쉬운 것도 아냐. 놓쳤기 때문에 모르거든. 지가 놓친 게 뭔 지 정확히 모른다니까. 어떻게 졌는지도 모르는 거라면...... 완패다. 뭔 자학을 이렇게까지?

이렇게 야차가 악귀를 짓밟고 있는 것같은 조각은 전직 개신교도 입장에선 너무 낯설어. 그래, 개신교와 카톨릭의 차이도 있겠구나.

 이것도...... '첫 여행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재미있는 실패'라 할 수 있나? 이 길과 도시의 역사를 공부하고 왔다면 여행이 충실하다는 느낌을 받았을까? 그리 거창한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어. 길에서의 내 태도를 정하고 보고 들으며 생긴 호기심을 괜찮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징검다리만큼의 정보만 챙겨갔어도 좋았을 거야. 대부분의 여행에선 준비 없이 덤비는 게 재밌긴 한데 까미노는 워낙 많은 도시를 거치는 여행이라 현지 조달로 만으론 감당 안되더라. 아마 두 번째 까미노도 프랑스 길이 될 것 같은 이유가 '이 패전을 만회하기 위해서'일 것 같다. 리벤지 할 게 또 생겼어.

*

 아 잠깐만, 써놓고 보니 쫌 억울하네. 내가 뭘 그리 잘못했지?

 난 열심히 걸었어, 심지어 썩 잘. 동키나 점프도 없이 부상당한 친구들 도와가면서 생에 첫 까미노 - 프랑스 길을 완주했다고. 잘 걸어놓고 왜 구질구질하게 준비가 부족한 여행이었다며 궁상인 거야? 준비할 때는 '이 길을 안전하게 끝까지 걷고 무사히 돌아올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잖아. 당연하지, 모든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거야. 그래 놓고 다 걷고 난 지금 와서 완주 따윈 당연했었다 폄하하고 미쳐 준비하지 못해 놓친 것들에 대해서만 말하는 건 호들갑이지.

저 달궈진 아스팔트 좀 봐라, 말이 쉬워 800km 지.

 내가 놀았니? 길이 쉬웠어? 말했잖아, 한여름 까미노 힘들다고. 트레커 경험치 다 긁어도 모자라 진통제랑 근육 이완제 먹어가며 빈대 물린 다리에 테이프 감고서 걸었어. 그 힘들었던 건 왜 하찮게 취급해?  혹시나 부상으로 병원 신세지면서 며칠 연박하고 추슬러 이 악물고서 완주했다면 이딴 호강에 겨운 생각 안 했으려나?  천 년 전, 이 길에서 온갖 위험과 싸우며 죽음까지 각오하고서 걸었던 순례자 중 어느 누가 '길이 너무 안전하고 편해서 아쉬웠어요'라 했을까. 환경이 좋아지고 장비가 발달해 큰 고생 없이 완주한 게 죄책감 가질 일은 아니잖아. 애초에 생각지도 않았던 부족한 부분까지 찾아내서 스스로 지적할 필요는 없어. 부족한 거야 니 생겨먹은 게 그런 탓인 걸 어쩌겠니. 그리고, 놓쳤다는 그거 공부하고 갔으면 더 좋았을 거 확실하지도 않거든. 정보가 아니라 종교에 대한 태도가 문제일 수도 있잖아. 그럼 아예 살아온 방식이 달랐어야 하는 거 아냐? 

 산티아고가 누군 지도 모르고 시작하는 까미노. 이딴 걸 언제 또 하겠니? 첫 까미노에서만 할 수 있는 거야. 게다가 그렇게 허술했던 준비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완주했잖아. 훌륭해, 예상 적중, 초과 달성이야! 솔직히 별 공부 안해도 익숙한 방식이 통하겠다 싶어 여길 고른 거잖아. 처음부터 트레커로 출발한 주제에 이제 와 뭔 욕심이람. 화장실 다녀왔어? 왜 갈 때랑 와서랑 말이 달라?

  

그러니까 닥쳐! 난 충분히, 충실히 잘 걸었어.

여윽시, 이쪽 동굴이 편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