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2. 산마르띤 델 까미노_발데비에아스 ( 24.0km )
아스토르가는 길에서 대충 둘러보기만 하고 한 발짝 더 가 발데비에아스에서 멈췄다. 레온 빠져나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아 대도시가 그리 반갑진 않았거든. 순례길 내내 느꼈던 건데 큰 도시의 바쁜 시민들은 순례객을 귀찮아하고, 작은 마을의 주민들은 좀 살갑게 맞아 주시더라.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런 성향이 좀 있어. 그래서 길의 2/3쯤인 지금까지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보다는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 찾아보는 걸 더 재밌어한다. 마트에서 채운 장바구니 들고서 주교 궁도, 대성당도 '이거 또 봐야 하나.....?'며 심드렁하게 아스토르가를 빠져나갔다.
0813. 발데비에아스_폰세바돈 ( 23.5km )
0814. 폰세바돈_폰페라다 ( 27.0km )
폰세바돈에서 철 십자가를 향해 출발하는 새벽, 윤서가 어플로 확인한 현재 기온이 4℃란다. 야, 그 정도면 가을용 침낭 내한 온도보다 낮은 거잖아. 나 지금 산바람 맞으면서 걷고 있다고. 4도? 바람만 잘 불면 이슬 얼어붙겠다야. 가지고 간 옷 모두 레이어드 해서 껴입었는데도 턱이 덜덜 떨렸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이 오한을 어떡하지? 비옷까지 뒤집어쓰고 노숙자 행색으로 걸어야 해? 이것도 나름 유럽 여행인데? 여기 덥다며, 더워서 고생할 거라며! 우리한테 왜 이러니?
해외여행할 때 거치적거리고 짜증 나는 것 중 하나가 원화 동전이다. 출발 준비 허술하게 했거나 면세점에서 생각 없이 현금 사용하면 이게 지갑 속에 들어오기도 하는데, 돈을 길에다 버릴 수는 없으니 외국 친구에게 기념품으로 주든지 해서 털어버리지 않는 한 '절대' 소모되지 않으면서 부피 대비 극악의 무게로 날 괴롭히거든. 짤랑거리며 따라오는 그 소리가 내 멍청함을 비웃는 것 같아 여행 내내 거슬린다. 도트 데미지(속성-심리) 이번 여행은 면세점도 패스했는데 어쩐 일인지 백 원짜리 하나가 딸려왔더라. 뒤집어 털었어야 했을 지갑을 대충 만져 보고 정리하느라 카드 사이에 끼었던 동전 하날 놓쳤네. 젠장, 이 쇳덩이를 서울서부터 이고 지고 왔어.
순례객 중엔 철십자가 아래에 두고 올 돌을 가져가는 분들도 있다. 한국부터 건 생쟝부터 건 자신이 지은 죄만큼의 무게라는 그 돌을 배낭에 더한다는 것은 죄 사함을 빌면서 최소한의 땀이라도 지불하겠다는 각오일 테지. '만만찮을 텐데.....' 싶으면서도 순례자가 아닌 트레커였던 난 별 신경 안 썼다. 그런데 지금 내겐 서울 내 방에서부터 들고 걸었던 동전이 있잖아. '그래, 죄의 경중을 따지자면 돈으로 지은 것만큼 무거운 게 또 없지.' 하여, 그 동전을 철십자가 아래 두고 왔다. 지은 죄만큼의 무게까지는 어림도 없겠지만 비중량으로는 좀 비빌 만하겠네. 충무공을 예까지 모시고 와 내 죗값으로 넘기다니, 죄를 돌려 막는 기분이야. 돌아가면 현충사 한 번 들러야 하나...... -.-;;;
0815. 폰페라다_뜨라바델로 ( 33.0km )
'비야프랑카'로 시작하는 마을이 하나 더 있다. 부르고스 전의 '비야프랑카 몬떼스 데 오까' 그런데 한국인 순례자들이 비야프랑카라고 하면 여기 _델 비에르소를 말한다. 규모 차이가 나는 두 마을이 있으면 둘 중에 큰 마을이 그 이름을 대표하게 되는 게 자연스런 데다 여긴 스페인 하숙의 도시로 기억되는 곳이거든. 하숙집이 궁금하긴 했어도 이번엔 패스, 묵을 것도 아니면서 관광차 찾아가는 게 민폐 기도 하고 예까지 와서 예능 촬영지 둘러보는 건 쌩뚱맞지. '같이 걸을까?' 보고서 순례길 맘먹었냐고 물어오는 것도 기분 좋지 않았거든.
0816. 뜨라바델로_오세브레이로_폰프리아 ( 32.0km )
0817. 폰프리아_사모스_사리아 ( 34.5km )
0818.사리아_뽀르또 마린 ( 23.0km )
사리아부터는 사람이 확 늘어난다. 완주증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100km 구간을 걷는 단체가 여기로 들어와서 시작하는 탓이다. 혼자 걷는 입장에서야 두 명도 단체긴 한데, 그런 삼삼 오오 규모가 아니라 티 맞춰 입고 무리 지어 길 막아가며 걷는 팀들. '아니 이 길에서까지 레이드 뛰는 거야?' 플랜카드 펼치고 사진 찍는 거 볼 땐 '야~ 사리아 넘긴 넘었구나' 싶더라. 멜리데부터는 Primitivo 길의 순례객까지 합류해서 숙소 잡기가 만만찮아 이후의 모든 숙소를 전화나 부킹사이트에서 예약하고 갔었다. 굳이 그럴 필요 까진 없었는데 사람 많아져서 올라가는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 불안 요소를 하나라도 줄여야 했거든. 길이 끝나갈 때쯤이면 마음이 평안해진다더만 꼭 그런 것도 아니네......-.-;;;
'와, 이게 표지석이란 건 가봐. 하·하·호·호 이제부터 118km 화이팅~!'
생쟝이나 레온 출발한 입장에서는 사리아 출발 단체 팀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ㅇㅇ, 그럴 수 있어. '근 700을 밟아온 난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그지 꼴인데 저 무리는 무엇이 즐거워 저리 천방지축 깔깔거린단 말인가' 이런 일방통행 억하심정. 길 막는 거보다 그 해맑음이 더 싫었어. 생쟝에서부터 걸어온 사람들은 100km 표지석을 지날 즈음 제 각각의 이유로 마음이 울컥/숙연해진다. 나는 이 행복한 여행이 곧 끝난다는 아쉬움과, 뭐라 의미 부여해도 몸뚱아리엔 고생길인 이 여정을 빨리 끝내고 싶은 생각이 섞여서 남은 4일은 마무리답게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지난 길을 반추하며 걷고 싶었어. 그런데 오늘 출발한 저 희망찬 순례객들 입장에선 신나는 화이팅과 왁자지껄이 자연스러운 거라. 같은 길 위에서 다른 세상을 걷는 이질감. 나와 많이 다른 분위기의 사람들과 함께 걷기 부대꼈다. 생쟝 부심 같은 게 아니라고.
근데 따지고 보면 숙소와 길을 좀 번잡하게 만든다는 것 외에는 딱히 피해 준 것도 없는 사람들인데 왜 그리 뵈기 싫었는지 몰라......-.-;;;; 나도 한 달 전엔 생쟝에서 저렇게 출발했으면서. 나 힘든 게 저 양반들 때문이 아니잖아. 그래, 내 속이 좁은 탓이다. 이 길의 끝에서 만난 나와 다른 모습의 순례객들은 마음 다스리라고 하늘이 보내주신 보살님들인 거시야.
근데 솔직히 사리아에서 출발하신 분들은 만나도 나눌 말이 딱히 안 떠오르더라. 레온 출발 팀과는 메세타 끝자락과 갈리시아 들어오는 고개를 걸었던 공감대가 있어서 뭐라도 이야깃거리를 찾을만한데 오늘 출발하셨다는 분들과는 영...... 고작 한다는 말이 '천천히 가세요. 둘째 날이 더 힘들어요' 따위? 데면데면하게 만나 뻘쭘해지는 것이, 서로 첫인상이 좋아지기 어려운 합류다.
까미노를 걷는 내내 저 표지석이 따라다닌다. 가장 인프라가 좋다는 프랑스 길임에도 주마다 관리 방식이 달라 좀 띄엄띄엄 해도 저게 은근 기준이 되어준다. 절반까지는 지루할 만치 거리가 안 줄어드는데 350 넘으면서 내리막 달리듯 빨라지는 느낌이고, 200 넘으면 '헉, 이제 앞자리가 1이야?' 그러다가 드.디.어. 100을 꺾으면 이젠 십 단위! 여길 넘어가는 This is the moment, 생쟝에서부터 저걸 보면서 걸어온 순례자에겐 특별한 순간이다.
0819. 뽀르또마린_멜리데 ( 40.0km )
0820 .멜리데_아루아 ( 33.0km )
0821. 아루아_산티아고 ( 23.5km )
마지막 날, 아루아에서 산티아고까지 21.5km. 07:30 출발, 12:00 도착. 다섯 시간이 채 안 걸렸다. 순례길 중반부턴 이렇게 되드라. 점심 먹을 마을을 20km 부근에서 고르게 되는 거지. 이 생활도 이젠 끝났네. 그런데 대성당은 어디 있는 거야? 산티아고 들어오면 짜잔~! 하고 보이는 거 아니었어?
광장은 순례자와 관광객으로 가득 차 있다. 만족하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자세와 구도를 바꿔가며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는 친구들, 대형을 펼쳐 인증샷을 찍는 단체, 입구에서부터 노래 부르며 광장 가운데로 걸어와 강강술래 대형으로 순례를 마무리하는 팀, 아직 도착의 감격을 붙잡고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성당을 올려다보는 순례자, 바닥에 부려놓은 짐만으로도 걸어온 방식을 짐작케 하는 전투형 여행자는 광장이 안방인 양 드러누워 평안한 표정이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광장을 메우고 이 길의 마지막 풍경을 즐기며 스스로 풍경이 되는 사람들. 평화로운 모습이다. Amén
까미노는 어떤 경로를 거치든 이 광장으로 오게 된다. 지난 한 달 동안의 길에서의 감정 - 즐거웠다가도 짜증 나서 걷기 싫어지는 길, 홀딱 반해버린/기대했다가 배신당한 음식, 아름다운 경치, 힘들게 하는 날씨, 길에서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 - 그 사이의 이야기. 그 모든 건 이곳으로 오는 과정이었다. 시청 기둥에 기대 우비 깔고 앉아 멍 때리면서 지난 한 달 동안 내가 만났던 모든 것에 감사드렸다. 좋은 여행이었다고 평하기엔 경험한 것들이 이 길의 극히 일부분이어서 코끼리 다리 더듬는 장님 같은 민망함이 있긴 해도 좋은 건 좋은 거지.
한국 떠나온 지 딱 한 달 만이다. 도착하면 어떤 느낌일까? 눈물이 흐를까? 설마......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이게 스토리가 감정선이랑 따로 놀아. 오늘은 이 길에 완전히 적응한 패턴대로 점심 먹기 전에 걷는 걸 끝냈거든. 편안했단 소리야. 그러니 감정적으로 클라이맥스를 맞기엔 어색한 거라. 갈리시아나 100km 표지석 앞이었다면 좀 다를 수 있겠는데 여긴 좀 그래. 울기엔 몸이 너무 편하다야. 사리아에서부터 들던 '이 길 빨리 끝내버려야겠다'란 생각이 맞았어. 긴 길 수고했다.
다음 까미노는 어떤 길이 될까? 도착한 지 한 시간 만에 다음 턴을 그려보고 있네. 이상한 여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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